사피엔스

2020. 12. 3. 00:26책, 1년에 10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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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탄의 도구들, 유시민의 공감필법, 책읽어드립니다, 그 외에 많은 유투버들이 리뷰하고 언급했던 책, 사피엔스. 작가는 히브리 대학의 역사학 교수 유발 하라리. 

 

많은 사람들이 읽어서, 그리고 도서관에서 자주 눈길을 줬던 책이라 표지가 매우 익숙하다. 하지만 왠지 선뜻 손이가지 않았던 책. 두꺼워서 일지도, 다른 사람들이 많이 읽었다고 하니 청개구리병 때문에 난 읽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결국 나도 보게 되었고, 추천하고 싶은 책이 되었다. 나의 베스트5 추천책을 꼽으라면 그중에 한권이 이 책이 될 듯하다. 그런데 인터넷 평점은 8점대네...ㅎ

 

역사에 대해서 거시적인 관점에서 큰 흐름을 주관적이지만 나도 수긍할만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흡사 빅뱅에서부터 시작하여 우주에 대해서 설명하고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 얘기하는 칼세이건의 코스모스 처럼. 그리고 인디언 족장이 자기 부족의 신화와 전설을 부족의 아이들에게 얘기해주듯이 빠져들게 만든다. 그래서 다음 책으로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를 읽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유발 하라리가 그 책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고 하니. 

 

 

 

   책 내용 정리

 

7만년전 인지혁명 - 약 7만년 전부터 3만년 전 사이에 출현한 새로운 사고방식과 의사소통 방식을 말함

1.2만년전 농업혁명

5백년전 과학혁명

2백년전 산업혁명

 

사람들은 자신의 결정이 가져올 결과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우리는 약자가 이기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역사에 정의란 없다. 과거에 존재했던 문화 대부분은 늦든 이르든 어떤 무자비한 제국의 군대에 희생되었고, 제국은 이들 문화를 망각 속에 밀어 넣었다. 제국도 마침내 무너지지만, 대체로 풍성하고 지속적인 유산을 남긴다. 21세기를 사는 거의 모든 사람은 어디가 되었든 제국의 후예이다. 

 

우리 눈앞에서 형성되고 있는 지구제국은 특정 국가나 인종 집단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제국은 다인종 엘리트가 통치하며, 공통의 문화와 이익에 의해 지탱된다. 전 세계에 걸쳐 점점 더 많은 기업가 엔지니어, 학자, 법률가, 경영인이 이 제국에 동참하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 

 

고통은 집착에서 생긴다. 

번뇌는 집착에서 일어나는 것, 번뇌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나는데 있다는 것,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실재를 있는 그대로 경험하도록 마음을 훈련시키는데 있다는 것이었다. 

 

역사는 이른바 '2단계' 카우스계다. 카오스계에는 두 종류가 있다. 1단계 카오스는 자신에 대한 예언에 반응을 하지 않는 카오스다. 가령 날씨는 1단계 카오스계다. 날씨는 무수히 많은 요인의 영향을 받지만,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요인을 고려하는 컴퓨터 모델을 만들어 점점 더 정확하게 예보할 수 있다. 2단계 카오스는 스스로에 대한 예측에 반응하는 카오스다. 그러므로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다. 만일 우리가 내일의 석유 가격을 1백 퍼센트 정확하게 예측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석유 가격은 예측에 즉각 반응할 것이고 해당 예측은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정치도 2단계 카오스계다. 

 

아폴로 11호 우주비행사들이 몇개월간 미국 서부 사막에서 훈련을 하던 중, 늙은 아메리카 원주민과 우연히 마주쳤다. 남자는 우주비행사에게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달을 탐사하기 위해 곧 떠날 원정대의 대원들이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노인은 잠깐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자신을 위해 부탁 하나만 들어달라는 것이었다. 

" 무엇을 원하세요?" 그들은 물었다. 

"우리 부족 사람들은 달에 신성한 정령들이 산다고 믿는다오. 그들에게 우리 부족에서 보내는 중요한 메시지를 당신들이 전해줄 수 있을까 해서."

"그 메시지가 뭔데요?" 우주비행사들이 물었다. 

남자는 자기 부족 언어로 뭐라고 말을 했고, 우주 비행사들에게 그 말을 정확히 외울 떄까지 계속 되풀이 해서 말하게 시켰다

"그게 무슨 뜻이지요?" 우주비행사들은 물었다. 

"그건 말할 수 없어요. 이 말의 뜻은 우리 부족과 달의 정령들에게만 허락된 비밀이랍니다."

기지로 돌아온 우주비행사들은 그 부족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수소문한 끝에 마침내 통역할 사람을 찾아내어, 비밀 메시지를 해석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들이 암기한 내용을 되뇌자 통역자는 껄껄 웃기 시작했다. 웃음이 잦아들자 우주비행사들은 무슨 뜻인지 물었다. 통역자는 비행사들이 조심스럽게 암기한 문장을 이렇게 번역했다.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은 한마디도  밎지마세요. 이들은 당신들의 땅을 훔치러 왔어요."

 

현대 이데올로기와 정치 프로그램 대부분은 무엇이 진정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 민족주의자는 정치적 자기결정권이 우리 행복에 필수요소라고 믿는다. 공산주의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시행되면 모두가 행복해질 것이라고 가정한다. 자본주의는 오로지 자유시장만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행복에 대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정의는 '주관적 안녕'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행복은 자신 속에서 스스로 느끼는 무엇이다. 다시 말해 내 삶이 진해되는 방식에 대해 느끼는 즉각적인 기쁜 감정이나 장기적인 만족감이다. 이를 위해 설문조사를 통해 사람들의 행복을 측정해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결론중 하나는, 돈이 실제로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느 정도까지만이며, 그정도를 넘어서면 돈은 중요치 한다. 또 다른 흥미로운 발견은 질병과 행복의 관계다. 질병이 단기적인 행복감을 낮추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장기적인 행복감을 감소시키는 것은 두가지 경우 뿐인데, 하나는 상태가 점점 나빠지는 것이고 또하나는 그 병이 사람을 쇠약하게 만드는 지속적인 고통을 주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행복이 부나 건강, 심지어 공동체 같은 객관적 조건에 전적으로 좌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행복은 객관적인 조건과 주관적 기대 사이의 상관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생물학자들에 따르면, 우리의 정신 세계와 감정 세계는 수백만 년의 진화에 의해 만들어진 생화학적 체제의 지배를 받는다. 다른 모든 정신적 상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행복도 외부 변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다양한 생화학적 물질에 의해 결정된다. 

 

의미 있는 삶은 한창 고난을 겪는 와중이더라도 지극히 행복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의미 없는 삶은 아무리 안락할지라도 끔찍한 시련이다. 

 

행복의 관건은 의미에 대한 개인의 환상을 폭넓게 퍼진 집단적 환상에 맞추는 데 있을지 모른다. 내 개인적 내러티브가 주변 사람들의 내러티브와 일치하는 한 나는 내 삶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으며, 그 확신을 통해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꽤 우울한 결론이다. 행복은 정말로 자기 기만에 달려 있는 것일까?

 

만일 행복이 쾌락적 감각을 느끼는 데 기반을 두고 있다면, 우리는 더 행복해지기 위해 스스로의 생화학 시스템을 개조할 필요가 있다. 만일 행복이 삶의 의미를 느끼는 데 기반을 두고 있다면, 우리는 더 행복해지기 위해 스스로를 좀더 효과적으로 기만할 필요가 있다. 세번째 선택지는 없는 것일까? 앞의 두 견해는 행복이란 모종의 주관적 느낌(쾌감이든 의미든)이라는 가정을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의 행복을 판단하려면 그들에게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보기만 하면 된다는 가정을 깔고 있다. 

 

대부분의 종교와 철학은 행복에 대해 자유주의와는 매우 다른 접근법을 취했다.

 

불교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을 즐거운 감정과, 고통을 불쾌한 감정과 동일시한다. 그래서 자신의 느낌을 매우 중요시하며, 점점 더 많은 즐거움을 추구하는 한편 고통을 피하려고 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일은 그저 즐거운 감정을 느끼기 위한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의 감정이 바다의 파도처럼 매 순간 변화하는 순간적 요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5분전의 나는 즐겁고 결의에 차 있었지만, 지금 나는 슬프고 낙담해 있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즐거운 감정을 경험하고 싶다면, 불쾌한 감정을 몰아내면서 즐거운 감정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 설령 한번 그러는데 성공했다 해도 곧바로 모든 것을 다시 지가해야 한다. 그간의 노고에 대한 보상은 전혀 없다. 

그토록 덧없는 보상을 받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나타나자 마자 곧바로 사라지는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해서 그토록 힘들게 분투할 필요가 무엇인가? 번뇌의 진정한 근원은 이처럼 순간적인 감정을 무의미하게 끝없이 추구하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항상 긴장하고, 동요하고, 불만족스러운 상태에 놓인다. 

사람들이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런저런 덧없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속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갈망을 멈추는데 있다. 이것이 불교 명상의 목표이다. 명상을 할 때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깊이 관찰하여 모든 감정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며, 그런 감정을 추구하는 것의 덧없음을 깨달아야 하다. 그런 추구를 중단하면 마음은 느긋하고, 밝고, 만족스러워진다. 즐거움, 분노, 권태, 정욕 등 모든 종류의 감정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일단 당신이 특정한 감정에 대한 추구를 멈추면 어떤 감정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공상하는 대신에 지금 이순간을 사는 것이다. 그 결과 완전한 평정을 얻게 된다.

 

행복이 외적 조건에 달려 있지 않다고 하는 점에서 부처의 생각은 현대 생물학이나 뉴에이지 운동과 궤를 같이하지만, 부처의 가장 심원하고 중요한 통찰은 따로 있다. 진정한 행복은 주관적 느낌이나 감정과도 무관하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스스로의 주관적 느낌을 중요하게 여기면 여길수록 우리는 더 많이 집착하게 되고, 괴로움도 더욱 심해진다. 부처가 권하는 것은 우리가 외적 성취의 추구뿐 아니라 내 내면의 느낌에 대한 추구 역시 중단하는 것이다. 

 

주관적 안녕을 묻는 설문은 우리의 안녕을 주관적 느낌과 동일시하고, 행복의 추구를 특정한 감정 상태의 추구와 동일시 한다. 많은 전통철학과 불교를 비롯한 종교는 이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한다. 행복을 얻는 비결은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자신이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감정, 생각, 호불호를 자신과 동일시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이들은 분노를 느끼면 '나는 화가 났다. 이것은 나의 분노다.' 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감정을 피하고 또 다른 감정을 추구하느라 일생을 보낸다. 그들은 자신과 자신의 감정은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특정한 감정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행위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함정이라는 사실도 모른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행복의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 전체는 오도된 것일 수 있다. 주된 질문은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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